'2ːD¸estino'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11.04 와우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것들
  2. 2013.11.17 개발자를 위한 10가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팁 (10 Productivity tips for software developers )
  3. 2013.06.28 한국역사의 특수성과 한국인의 우수성 - 허성도 교수

출처:http://www.mmo-champion.com/threads/726876-Some-things-you-didn-t-know-about-WoW

World of Warcraft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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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때 스칼로맨스는 인던 바깥의 엘리트 구역이었다.(아마도 지금 슬픔의 언덕 구역) 그러나 개발자는 이 곳을 엄청 크고 아주 잘 만들었기 때문에 인스턴스 던전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방패(shield)와 둥근 방패(buckler)가 있었다. 도적과 냥꾼은 둥근방패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둥근방패는 삭제되었고 도적과 냥꾼은 더 이상 방패를 낄 수 있었다. 아직도 게임내에는 둥근방패가 존재하지만 방패로 분류되어있다.
-냥꾼의 생존 특성은 근접트리였다고 한다. 렙60때 100미만의 피해를 주는 Lacerate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의 수양 특성은 근접트리였다고 한다.(다른 게임에서의 수도사처럼) 그게 바로 왜 내면의 열정이 전투력을 올려주는지 이유다.
-오리 베타때는 드워프는 마법사를 선택 할 수 있었다.
-냥꾼은 집중을 자원시스템으로 사용하였지만 서 있을 때에도 충전되었고 이것은 너무도 좋아서 대신 마나시스템을 받았다.
-몇몇 직업은 능력치를 일정 숫자만큼만 올려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예를 들면 20/40/60/80/100 마법 데미지, 퍼센트가 아니라 그냥 100 데미지) 이것들은 장비나 레벨에 따라 올라가지 않았다.
-오리 초창기때에는 장비 대부분에 주문 공격력이 없었다. 렙60 마법사가 30보다 낮은 주문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작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많은 망토들이 정확히 서로 똑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망토에 방어구 타입이 있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천망토, 가죽망토,사슬망토,판금망토)
-가시덤불골짜기 서쪽해변 쪽에는 개발자가 없애버린 두개의 큰 섬이 있었다. 그러나 탈것과 수면보행이 있으면 원래 섬들이 있었던 장소에 갈 수 있고 그 지역에 진입했을 때 Isle of Doctor Lapidis or Gillijim's Isle이라고 뜨는것을 볼 수 있다.
-엘윈 숲,스톰윈드,서부몰락지대는 블리자드가 2001년 전에 처음 만든 지역이었다. 그래서 다른 시작지역보다 형편 없다.
-야즈샤라에는 아주 적은 퀘스트만 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블리자드는 아즈샤라를 병X같이 만들었고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걸 싫어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고 미래의 확장팩(대격변)을 위해 남겨뒀다.
-오리 알파전 원래 와우 디자인에서는 호드와 얼라이언스는 서로 100개의 퀘스트만 가지고 있었다.
-출시때에 실리더스 지역에는 퀘스트 혹은 중요한 요소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 패치로 추가되었다.
-레벨 50 부근에는 퀘스트가 너무 적었고 플레이어들은 레벨업을 위해 몹 잡기 노가다를 하는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블리자드는 나중에 퀘스트를 더 추가하였다.
-검은바위 첨탑,스트라솔름,스칼로맨스는 15인 레이드에 맞춰졌지만 15명으로 깨기에도 어려웠다.  나중에 검은바위 첨탑상층은 10인으로, 나머지는 5인 던전으로 바꿨다.
-불타는 성전 출시전에 죽음의 폐광 입구를 점멸로 통과하고 미완성된 터널에서 저속낙하를 쓰면 초기 버전의 지옥불반도에 갈 수 있었다.
-에메랄드 드림은 오리때에 공개되기로 하였으나(지역/레이드/대륙 중 하나로) 블리자드는 이 지역을 제거해 버렸다. 아직 게임 파일내에 남아있지만 정식서버에서는 접근 할 수 없다.
-티어2셋을 화산 심장부에서 구할 수 있었고 다른 그래픽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 출시때 에픽 탈것은 갑주가 없는 다른 색깔의 일반 탈것이었다  그들은 이것들을 제거하였고 갑주가 있는것으로 바꾸었다.(Ivory Raptor에게 애도를)
-타우렌은 탈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신 초원의 질주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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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포지는 게임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왜냐하면 한개의 층이 존재하는 대신 두개의  층이 존재했기 때문. 그 중 아직도 존재하는 한 층은 전보다는 작아졌다. 대용광로도 역시 볼 수 있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91ZKb61xxX0)
-놈리건은 원래 다른 종족의 도시같이 대도시로 계획되었고 아이언포지의 엘리베이터는 놈리건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블리자드는 진영간 균형때문에 놈리건을 인스턴스 던전으로 바꾸었다.
-언더시티는 길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2층을 제거해 버렸다.(여긴 아직도 접근 가능하다)
-인간과 오크는 블리자드가 게임내 구현한 최초의 종족이다.
-인간 여캐와 오크남캐는 약간 다른 모델을 사용하였다.
-만약 트롤여캐가 알파때 어떻게 생겼는지 본다면 무서울 것이다.

 

 

-황금골은 엄청나게 컸고 실제의 마을과 비슷했다. 그러나 블리자드는 다른 시작지역들을 황금골처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금골의 많은 건물들을 제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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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의 그래픽은 출시 이후에도 발전했지만 알파때의 그래픽은 더 리얼했고(하지만 품질은 지금보다는 낮았다) 블리자드는 그래픽을 하향 조정했다.
-낙스마라스는 현재에도 동부역병지대에 존재한다.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볼 수도 없지만 만약 리치왕의 분노 전에 캐릭터를 구 낙스라마스에 세워두고 종료했다면 다시 로그인 했을 때 노스렌드의 포탈을 가지고 있는 동부역병지대 낙스라마스에 나타났다.
(http://www.youtube.com/watch?v=ZpLjxvPBE8M)
-언데드는 얼라이언스와 대화 할 수 있었다.
-언데드는 진짜 언데드여서 (언데드와 악마에게만 사용 가능했던)퇴마술같은 스킬이 먹혔다.
-포세이큰의 의지는 수면,양변,공포에 면역으로 만들어 주는 지속 효과였지만 블리자드는 오랫동안 그대로 놔 두지 않았다.
-베타때까지는 플레이어의 요청으로 망토가 보이지 않았다.
-PVP에서 메즈기는 점감이 없었다. 그래서 도적과 법사는 상대를 1분 이상 메즈가 가능했다.
-법사는 일찍부터 투명화를 가지고 있었고 투명화 상태에서 불작 시전이 가능했다. 많은 플레이어들의 징징때문에 제거되었다.
-중립도시에는 경비병이 없었기 때문에 학살이 심했다.
-마라우돈은 패치로 추가되었다.
-전사의 돌진은 사용시 달리는 속도를 증가시켜주는게 아니라 사용대상에 순간이동하였다.
-마법봉은 자동공격이 되질 않아서 때릴때마다 클릭해줘야 했다.
-마법은 무기 숙련 시스템과 비슷한 스킬 시스템을 보유했다."당신의 화염마법 숙련은 93으로 올랐습니다."
-불모의 땅에는 오직 한개의 무덤과 한개의 와이번 경로가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가 흑마의 추방은 30분의 재사용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사냥꾼에게 "죽은척 하기"가 주어지기 전에는 도적과 드루이드가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는 도적의 자물쇠 따기에 해당되는 "Khadgar's Unlocking"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 부여의 대가 NPC는 오직 울다만에만 있었다.
-각각의 주요 도시들은 자기들만의 경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르나서스는 쓸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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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제거된 전장인 아즈샤라 분화구는 게임에서 보인적이 없지만 게임파일 내부에 들어있다.
-(몹과 보스가 없는)검은늪은 2004년 부터 게임파일 내부에 존재했다.
-지옥불 반도는 54-60레벨 구역으로 예정되었었다.
-서부역병지대의 안돌할은 엄청나게 어려운 정예지역이었다.(화산심장부 장비를 가진 플레이어도 어려워함) 소환사 아라즈 난이도는 20명이상의 그룹에게 맞춰져 있었다. 구역의 경계에 무너져내린 벽이 둘러져 있었지만 나중에 제거되었다.
-프로그래머의 섬과 디자이너의 섬이 게임파일내에 존재하지만 이 구역들에는 접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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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징시스템은 잠깐 테스트되었고 완전히 제거되었다.
-오리지날 와우 시네마틱의 초반부를 보면 실리더스의 반절이 없는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이때 당시 그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원래 지옥불반도는 워크래프트3의 지옥불반도를 닮았다.
-블리자드가 에메랄드 드림은 굉장하다고 말했던것은 틀리지 않았다.
(http://www.youtube.com/watch?v=V5oHucJj90s)

 

 

-최초로 드랍된 전설 아이템은 남작 게돈이 떨군 목걸이였다. 룻테이블에서 지워졌지만 이걸 전에 주웠던 플레이어는 그대로 갖고 있는게 허락됬다.
-사냥꾼은 베타때 마지막으로 소개된 직업이다.
-성기사의 심판은 시전시간이 있었다.
-고양술사에게는 탱커를 위한 특성과 마법이 있었지만 그들은 가끔 잔몹들을 탱킹하는것 외에는 다른것을 탱킹 못했다.
-흑마법사는 절벽에다 플레이어를 소환하는게 가능하였고 법사와 몇몇 클래스는 물속의 플레이어가 익사할때까지 메즈를 하는게 가능했다.
-전사의 무모한 희생은 대상의 방어력을 0까지 낮췄었다.
-발매당시 PvP컨텐츠는 전혀 없었다. 몇달 뒤 전장과 명예 시스템이 추가됬다.
-비행 조련사들은 공격당했을 때 다른 NPC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씩 지속적인 시체지킴을 당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와우에는 다른 RPG처럼 클릭시 이동이란 기능이 있다.
-성기사는 지금은 없는 많은수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다. 격노의 문장, 성전사의 문장, 희생의 문장,분노의 문장등등. 또한 성전사의 일격과 신성한 일격을 가지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공포마 이름은 원래 "악몽"이었다. 
-발차기와 그외 차단기는 75%의 적중률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는 비전트리에 5포인트를 투자해서 비전 폭발을 즉시시전으로 만들 수 있었다. 환기 역시 특성이었다.
-주술사들은 용암 작렬과 번개 충격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때의 "하이브리드 직업"은 진짜 "하이브리드 직업"을 의미했다. 아이템에 붙은 능력치들이 조금 이상했는데 성기사/드루이드/주술사템에는 모든 능력치가 붙어 있었고 무슨 이유에선가 도적,전사등 몇몇 직업의 템에는 정신력같은 쓸모 없는 능력치가 붙어있었다.
-질풍의 무기 발동시 발생한 타격에도 질풍의 무기가 발동 할 수 있었다. 주술사는 운만 더럽게 좋으면 이론적으로 레이드 보스를 한방에 보낼 수 있었다.
-성기사의 징벌은 무한히 중첩을 쌓을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서 카자크를 한방에 보내버렸고 24시간 내로 핫픽스 되었다.
-마법사와 사제는 "수면"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십자군 수도원의 각 구역은 원래 하나의 인스턴스였지만 너무 컸기 때문에 4개로 분리됬다.
-60렙 딜 전사에게 가장 좋은 아이템은 렙44용 사슬인 Edgemaster's Handguards였다. 왜냐면 무기 숙련이 붙어 있었기 때문.
-도적과 전사의 둔기류 전문화는 대상을 일정확률로 기절시켰다. 리분때 방어구 관통력 추가로 바뀌었다.
-필사의 일격은 무기공격력의 200% 데미지와 50%의 치유량 감소 디버프를 입혔다. 치유량 감소 디버프는 별 쓸모가 없었는데 왜냐면 천떼기들은 1방이나 2방에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적 플레이어에게 걸린 버프를 볼 수는 없었지만 마법사는 "마법 감지"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의 소원과 격노(40%증가일때)는 극딜을 위해 같이 사용이 가능했다.
-와일드해머 부족과 깨진엄니 부족의 평판을 올릴 수 있었지만 보상은 전혀 없었다. 나중에 없어졌다.
-사냥꾼과 흑마법사의 펫은 플레이어 능력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리시절 최악의 퀘는 "깊고 푸른 바다"이다. 왜냐면 숨쉬기 시간은 60초밖에 안되는데 멀록들이 벽을 뚫고 애드가 됬기 때문.
-비전 저항은 없었지만 신성 저항은 있었다. 나중에는 반대로 바뀌었다.
-사냥꾼의 신비한 사격은 주문 공격력 기반이였다. 이게 왜 사냥꾼 2.5티어에 주문 공격력 추가가 붙은 이유다.
-치유 주문력과 주문 공격력은 서로 분리된 능력치였다. 그래서 신성사제/신성기사로 렙업하는건 정말 죽고 싶었다. 
-마법사의 비전 트리와 사제의 수양 트리는 마법봉 데미지를 상승시켜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3.0때 제거됬다.
-상처감염독 효과는 중첩에 따라 10%/20%/30%/40%/50%로 달랐다.
-독을 묻힐 확률이 낮아서 독 해제는 사실 좋은 전략이었다. 
-비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이언포지 비행장은 노움의 시작지역이었을거라는 루머가 있다.
-사제는 종족에 따라 특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가지는 기본스킬로 변했고 몇가지는 삭제됬다.(인간-구원의 기도, 트롤-무력화의 주술, 언데드-파멸의 역병)

 


-불성때 오크의 어깨 크기 버그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안좋은건 이 버그를 고치는데 2-3달이 걸렸다.
-언데드는 오늘날보다 약간 더 큰 어깨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울두아르때 한 GM은 사고로 한 플레이어에게 마틴 천둥매를 편지로 보냈다. 이 셔츠는 모든것을 한방에 보내는 사용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플레이어는 말리고스와 몇몇 울두아르 보스를 한방에 보내버리는데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의 통계창에서 말도 안되게 높은 "입힌 최대 피해량 수치"를 발견하였고 그는 영구 밴을 당했다.
-타우렌 여캐는 많은 장애물과 문들을 통과 하지 못한다. 전보다는 덜 하지만 아직도 그런다.
-타우렌은 화산심장부 입구에서 퀘스트를 주는 하이엘프 옆의 창문을 통과하는게 불가능했다.
-인스턴스 서버가 꽉 찼을때 화산심장부의 창을 통해서 입장하면 피할수 없는 용암속으로의 낙하와 함께 "인스턴스 서버가 꽉찼습니다. 다시 시도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볼수 있었다. 
-트롤은 다음과 같은 농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두 드워프들을 죽인다. 나는 밤에 세 드워프들을 죽인다. 나는 오후에 두 드워프들을 죽이고 나는 괜찮다고 느낀다. 나는 평화로울 때 두 드워프들을 죽이고 전쟁때 두 드워프들을 죽인다. 내가 두 드워프들을 죽이기전에 나는 두 드워프들을 죽이고 그 뒤 두 드워프들을 더 죽인다."  이 농담은 게임에서 제거되었는데 대마초 흡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ob Marley의 Smoke 2 Joints패러디)
-카라잔 뒤에는 사냥꾼의 독수리 눈, 주술사의 천리안외에는 접근 할 수 없는 기분나쁜 지하실이 있다. 잘 만들어졌고 아마 무슨 구역으로 만들 예정이었던것 같지만 블리자드는 이 지하실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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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알파때는 모든 인스턴스 입구는 "어둠의 문"모델을 사용했다. 아즈샤라 지역의 물 밑에 한 개의 어둠의 문이 있는데 아즈샤라 물 밑의 인스턴스로 통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니면 그냥 거기다 처 박아 뒀던가.
-만남의 돌은 소환을 위해 사용됬던게 아니라 인스턴스에 같이 갈 사람들을 찾기 위한 대기열에 등록하는데 사용됬다.
-예전에 보복은 시각 효과가 없었고 그 때 당시 상대방의 디버프를 보는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전사들은 보복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도적들에게 이를 사용했다.
-오리때 어떤 패치 다음에 뭔가 버그가 생겼고 전사는 1포인트를 더 받았다. 그래서 31/21/0트리를 찍을 수 있었고 매우 강력했다.
-사람들은 검은바위 첨탑 상층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많은 골드를 주기도 했다.
-알터렉 확고 무기는 플레이어를 기절 시키는 대신 뒤로 밀치기 효과가 있었다.
-동물 치료를 위해 주문력 장비를 입고 아주어고스를 솔플한 사냥꾼이 있었다.
-"끔살"은 오늘날에는 빠르게 죽었을때 쓰지만 오리때 마법사는 진정한 "끔살"을 할 수 있었다. 냉정/불작 매크로와 주문 공격력 두배 장신구를 사용했을 때 크리가 터지면 레이드 장비 전사도 한방에 보냈다.
-흑마는 깃전에서 상대방을 진짜로 죽일 수 있었다.
-"오랜 친구"위업은 와우 발매 당시 갑주가 없는 1000골마를 샀던 사람에게 주어졌다. 아주 적은 사람만이 이 위업을 가지고 있다.
-노래방에서 깃수가 벽타기를 사용하면 공격이 불가능한 장소에 갈 수 있었고 양 쪽 깃수가 이짓을 하면 플레이어들이 로그아웃할때까지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지능이 높으면 무기 숙련을 더 빨리 올릴 수 있었다.
-흑마의 서큐버스는 노출이 심했지만 나중에 블리자드는 서큐에게 옷을 더 입혔다.
-드루이드는 폼 변환을 하고 난 뒤 몇초동안 시전이 불가능했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특성이 있었다.
-주술사에게는 양손 도끼나 양손 둔기를 장착 가능하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시전바가 없을 때 주술사와 드루이드는 귀환석 시전모션이 힐모션과 같다는 것을 이용해서 낚시질을 했다.

 

 

-샤트라스의 해리스 필튼옆에는 "리콜 니치"라는 NPC가 있는데 오직 "신앙의 눈"을 착용한 사제만 볼 수 있다.
-대화창에 선을 이용하여 단어를 그릴 수 있는 것을 이용해 상대 진영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구루바시 지하묘지는 불타는 성전의 첫번째 투기장으로 예정되었으나 제거되었다.
-"죽은척 하기"가 끝나면 사냥꾼은 진짜 죽었다.
-스칼로맨스에는 방어력이 올라가는 셋 효과를 가진 천셋이 드랍됬었다.
-아즈샤라의 히포그리프는 게임내 다른몹보다 골드를 더 많이 드랍했기 때문에 보통 봇들이 이 지역에 죽치고 있었다.
-도적이 절을 사용시 은신이 플렸고 90%확률로 절 뒤에도 은신이 유지되는 특성이 있었다. 만약 인스턴스내에서 이 특성이 발동되지 않았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불성 베타시절 황천의 폭풍 지역에는 비전 피해를 입히는 단검이 있었는데 주문 공격력에 따라 데미지가 증가했다. 그래서 마법사가 이 단검을 들고 칼질하면 많이 아팠다. 
-조화 드루이드는 와우 출시 당시 쓸모가 없었다. 오리 중간에 블리자드는 올빼미 야수 폼을 추가해줬지만 여전히 병X이었다.
-깊은굴 지하철은 스톰윈드와 다르나서스 사이를 연결해 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리븐데어 남작의 해골마는 0.02%의 드랍확률을 가지고 있었다. 이 탈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신의 가호를 받았다고 여겨졌다.(특히 얼라) 지금은 드랍확률이 1%로 올랐다.

 

 

-도적의 함정 감지는 공이 위로 소용돌이 치며 올라가는 모션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도적들이 이것을 사랑했고 맨날 써댔다. 블리자드가 이 모션을 없앴을때 엄청 징징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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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의 수도인 언더마인은 공개될 예정이었다.
-게임에서 가장 희귀한 탈 것은 화려한 초록색 기계타조다.(GM이 플레이어가 삭제한 기계타조를 복구해 줄 때 실수로 줌)
(http://www.wowwiki.com/Fluorescent_Green_Mechanostrider)
-던 모로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만약 여길 들어가면 실리더스 일반 채널에 들어갈 수 있다.
-도적은 독 제조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독 중첩 수치가 있어서 공격할 때마다 이 수치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보스전시 무기에 자주 독을 발라줘야했다.
-오리시절때 블리자드는 그림자 성채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던전이고 많은 시간을 들인 곳이라고 말했다.
-오크의 종특인 피의 격노는 오직 근접 공격력 25%만 올려줬다. 지속시간이 다 됬을 시 45초동안 전투력이 25%줄어들고 모든 회복 효과가 50% 줄어드는 디버프가 걸렸다. 결과적으로 오크 흑마,복술,정술에게 쓸모가 없었다.
-전투상태때 방어구와 무기 교체가 가능했다.
-사냥꾼의 생존특성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Outdoorship(야외)"
-깃전에는 카운트다운이 없었다.
-PvP 장신구는 직업에 따라 효과가 달랐다. 예를 들어 전사는 오직 기절만 풀수 있었고 흑마는 (아마도)이감만 풀수 있었다.
-치유 기술은 거리제한이 30미터였고 이를 늘려주는 특성이 있었다.
-악마 지배는 해제가 가능했고 악마 지배가 해제된 악마는 흑마를 공격했다.
-채널링 스킬들(신비한 화살등)은 차단이 불가능 했다.
-와우 발매때 선박들은(그리고 비행선도?) 버그가 심했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고쳐질때까지 잠깐동안 사용불가가 된적이 있었다. 블리자드는 약간의 골드를 받고 플레이어들을 바로 순간이동 시켜주는 NPC를 추가했었다.
-와우 오리 때 불성 특성 패치가 된 뒤에 얼라이언스 주술사용 장비와 호드 성기사용 장비가 드랍됬다. 아직 얼라이언스 주술사와 호드 성기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장비들은 쓰레기였다.
-다르나서스와 몇몇 지역의 나이트 엘프 경비병들은 모두 여캐이다. 블러드 엘프 경비들은 항상 남캐이다. 
-2010년 8월에 중국에 와우가 출시 됬는데 이는 유럽/북미보다 2년 늦은 것이다.
-일본에는 와우를 서비스 하지 않는다.
-불성이 공개된지 6-7개월 뒤에 플레이어 캐릭인 드레나이가 공개됬다.

 

 

-아졸네룹은 십자군경기장 대신 레이드 인스턴스/지역으로 예정됬으나 이 구역을 너무 크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결국 한짓은 안카헤트와 아졸네룹 인스턴스 던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인터뷰에서 블리자드는 리치왕의 분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아졸네룹 지역을 만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던전과 무덤간의 가장 긴 시체달리기는 십자로-가시덩굴 우리다. 왜냐하면 불모의 땅에는 무덤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 필드 시체달리기 중 가장 긴 건 무덤 수정전의 칼날 산맥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두가 영혼의 치유사를 볼 수 있었다.
-십자로 서쪽에는 "코이터"라는 영혼의 치유사가 있는데 그는 마이클 코이터에 대한 기억으로 와우 개발당시 죽은 블리자드 아티스트다. 
-무법항 배위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의 기사가 죽음의 손길을 시전하면 그 사람은 대륙을 넘어서 알터렉 산맥 밑에 도달하였다.
(http://www.youtube.com/watch?v=aatKE0FF2m4)
-사냥꾼은 3방을 쏜 뒤 마나가 바낙났다. 그래서 PvP에서는 대개 자동공격만 사용했다. 그러나 PvE에서는 죽척+물마시기/장비바꾸기로 떄울 수 있었다.
-불행히도 부엉이들은 3개의 기술을 사용한뒤 마나가 바닥났다. 그래서 대개 /춤을 보려고 데려갔다.
-성기사의 축복은 지속시간이 5분이었다. 40명에게 축복을 걸면 첫번째 사람의 축복은 2-3분밖에 안 남았었다. 그래서 그들은 레이드내내 버프만 걸고 있었다.
-흑마의 죽음의 고리는 10분의 재사용 시간을 가지고 있었고 공포 효과가 없었다.
-흑마는 전장에서 전장적정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소환 할 수 있었다.
-가장 오랜기간 동안 공략되지 않은 보스는 모래폭풍 아우로이다.(쌍둥이 제왕이 공략된지 86일 걸림) 그 뒤로 크툰과 오닉시아가 있다. 왜냐하면 안퀴라즈 공개당시 버그가 너무 심했고 그는 보너스 보스였기 때문이다.
-만약 흑마가 그늘숲의 까마귀 언덕이나 로데론 폐허에서 투명체 감지를 쓰면 이 방법으로 밖에 볼 수 없는 50렙 몹을 볼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얼라 흑마는 빠르게 조각을 모을 수 있었다.
-알파때에는 전문기술이 생존기술로 불렸다. 여기에 모닥불 만들기와 횃불만들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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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은 탐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예전에는 그래픽 엔진이 약간 달랐다. 그늘숲같이 "진짜로" 어두운 지역에서는 20-30미터 전방 밖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횃불은 이런 어두운 곳에서 시야를 넓히는데 사용됬다. 그늘숲의 많은 NPC들은 아직도 그들 손에 횃불을 들고 있다.
-리치왕의 분노 출시전 대격변은 이미 개발단계였다.
-소리 설정에서 배경음악을 끄고 환경소리를 최대로 높인 다음 언더시티의 왕좌의 방에 들어가면 아서스와 그의 아버지 간의 대화내용을 들을 수 있다.
-왕좌의 방에 가기전 통로에서 아서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기 전에 사람들이 그에게 뿌린 장미꽃잎을 발견 할 수 있다. 또한 테레나스의 피가 묻은 왕관이 떨어진 곳에서 그의 피를 발견 할 수 있다.
-까마귀 언덕과 카라잔의 지하묘지에서 배경음악을 끄고 환경소리를 최대로 높이면 뭔가를 들을 수 있다.(그냥 심장박동 소리인듯)
-부엉이의 별똥별은 폼을 바꿨어도 취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별똥별+동물폼 상태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또한 30미터 안에 있는 플레이어의 은신을 풀 수 있었고 랜덤하게 3초간 기절을 시켰다.
-와우역사상 가장 쎈 직업은 3.0.1이 패치된지 24시간이 안 지났을 때의 징벌 기사다.(리분 특성을 가진 70렙) 천상의 폭풍은 신성 피해를 입히고 응징의 격노와 50%뎀감이 없는 천상의 보호막을 같이 쓸 수 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24시간이었죠!
-2001년 9월에 와우가 발표되었고 몇 년전부터 개발을 하고 있었다. 결국 와우를 개발하는데 10년이 걸린 셈이다.
-죽음의 기사와 몇몇 직업들은 와우 오리지날과 함께 공개하기로 계획했으나 나중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리치왕의 분노 개발단계에서 영웅 직업을 위한 3가지 카드가 있었다:강령술사,룬마술사,죽음의 기사. 결국에 블리자드는 이 세가지를 하나로 묶기로 했고 죽음의 기사에게 강령술사의 특징인 역병과 시체 폭발, 룬마술사의 특징인 룬마력을 주기로 했다. 이것이 왜(99.4%의 확률로) 우리가 미래에도 강령술사와 룬마술사를 볼 수 없는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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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이 발매된지 몇달동안 알도르 엘리베이터 아래에는 항상 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종종 "엘레베이터 보스"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떻게 쓰러뜨릴 수 있는지 공략을 쓰기도 했다.
-정신 마취 독과 언어의 저주는 시전시간을 60% 감소시켰다.
-언어의 저주에 걸린 상태에서 대화창에 뭔가를 치면 [악마 언어]로 보였다.
-카라잔 아래에는 커다란 웃는 얼굴 그림이 있다.
-불타는 성전이 막 출시됬을 때 카라잔 장비는 영웅 던전 장비보다 약해서 블리자드는 아이템들을 완전히 다시 수정해야 했다.
-불타는 성전이 막 나왔을 때 영웅던전들은 너무 어려워서 알카트라즈, 으스러진 손의 전당, 어둠의 미궁은 카라잔 장비로도 깨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나중에 너프되긴 했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이 던전들을 역병처럼 피했다.
-겨울 손아귀는 공중전으로 예정되었으나 취소됬다. 아직도 리치왕의 분노 패키지 상자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오닉시아의 "깊은 숨결"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어떨 때에 이 스킬이 발동되는지 몰라서(그냥 랜덤이었다.) 수많은 이론과 추측을 낳았다.
(충분하지 않은딜,충분하지 않은 도트,공대원들이 딜을 너무너무 천천히 하지 않은가,공대장 목소리 음색,공대장이 테크노 음악을 틀지 않았는가,레이드내에 노움 수,공대원들이 오늘 가몬을 죽인 수,브렐여캐/나엘여캐 중 진짜 여자가 아닌 사람 수등)
(http://www.wowwiki.com/Why_does_Onyxia_cast_Deep_Breath%3F)
-여기 예전 특성 트리가 있습니다. 냥꾼 특성 트리를 확인해 보세요!
(http://wowvault.ign.com/View.php?view=Talents.View.Beta&category_select_id=12)
-블리자드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제한된 역할에만 맞추어 레이드 디자인을 했다. 오직 전사만 탱커가 가능하고 사제는 최고의 힐러이고 드루이드는 사제에게 자극을 주고 주술사는 전투상태 밖에서 부활을 쓰고 성기사는 축복을 거느라 바빴다.
 드루이드,성기사 그리고 흑마(초창기 딜이 버프되기 전에 그들의 데미지는 쓰레기였다)는 딜이 가능한 특성이 전혀 없었다.
-하이브리드 클래스는 보통 퓨어딜러의 50%도 안되는 딜만 가능했다. "이건 뭐하는 야드인가요? 빨리 회복특성으로 바꾸고 사제님들에게 자극이나 드리세요!"
-게임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불성이 출시된 뒤 잠깐동안 대량의 주술사 너프가 이루어졌고 주술사 토론장은 징징으로 넘쳐났다. Tseric라고 불리는 GM은 이 토론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이 징징거림들에 미쳐버려서 주술사 토론장에 글을 쓰는 누구건 바로 밴을 했다. 얼마 뒤 그는 해고당했다.
-달라란의 호드 여관 옆에는 오직 기계공학의 벌레구멍 생성기로만 갈 수 있는 하수구가 있고 거기에는 기계 도안을 파는 NPC가 있다.
-만약 아침 7시40분쯤에 황금골 북쪽의 집에 들어가면 오망성을 이루고 있는 다섯명의 꼬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밴쉬들의 비명소리,음산한 음악과 크툰의 "너는 죽을 것이다"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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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숲의 부랑자 소굴 뒤에는 "Knight's Hollow"라고 불리는 장소로 연결된 길이 있다. 여기엔 이름모를 무덤과 어둠의 문에서 볼 수 있는 동상 두 개가 서 있다.
-가시덤불 골짜기에는 Samantha Swifthoof라는 타우렌 여캐가 있었는데 예전에 타우렌에게 초원의 질주를 가르쳐 주었다.
-타우렌(Tauren)은 자연(Nature)의 아나그램이다.
-던모로의 서쪽 지역은 "새로온자의 착륙지점"이라고 불렸는데 얼라이언스 새캐릭터가 생성됬을 때 시작 영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곳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특정지점에 서서 기다리면 렙1짜리 캐릭터가 잠깐 나타났다가 잠시 뒤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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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리스팔 숲 서쪽에는 땅에서 솟아나온 커다란 네개의 가시들을 볼 수 있는데 뒤에 있는 것들은 앞에 있는 것들보다 크다. 아마 지루했던 개발자가 만들었을 것 같다.
-티리스팔 숲 동쪽으로 헤엄치다보면 버려진 탑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 지역은 "Northeron"이라 불리지만 게임내에서 이 지역이 구현된 적은 없다.
-만약 아티쉬를 장비하고 카라잔의 아란의 망령에게 간다면 "그건 어디서 났지? 그 아이가 보냈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붉은 십자군 대성당에 타락한 파멸의 인도자를 들고가면 고유 이벤트를 볼 수 있다.
-스톰윈드 구 시가지에 있는 막혀있는 포탈은 하우징 시스템을 위해 만들어졌다.
-정령의 옥좌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한다면 정령 군주들이 즉시 한방에 죽여버린다.
-점멸 아이콘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게 드워프인 것을 알 수있다.
-티리스팔 숲에는 천하무적(리치왕 탈것)의 묘가 있다.
-카라잔은 꼭대기에 비행경로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사실 그리폰 둥지가 존재하긴 하지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장신구 칸이 4개였다.
-오그리마입구의 밧줄과 나무들은 사실 벽에 그려진거다.
-알파때 흑마는 가죽을 입었다.
-몇몇 보스들은 몇가지 종류의 마법이나 독에 완전 면역이었다. 마법사는 화산 심장부에 냉법으로 다니고 도적은 독 면역 보스를 만나면 딜이 많이 떨어졌다.
-휴식경험치가 재설계되기 전에는 캐릭터가 휴식을 취하지 않고 장시간 게임을 할 때 원래 경험치의 25%, 50% 같은 감소된 경험치를 얻었다.
-베타때 방특전사의 궁극기는 전투상태시 정신력의 일정 퍼센트에 따라 체력이 회복되는 지속 효과인 Combat Endurance였다.
-검은날개 둥지 및 화산 심장부 공대장들은 종종 공대원들에게 귀환석을 카르가스로 설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리치왕의 분노 출시 얼마 뒤 어떤 마법사는 낙스라마스의 잔몹에게서 뼈보호막을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서 낙스 솔플을 했다.
-마법사는 베타때 "환상"이라는 지금의 환영복제와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베타때 주술사는 드루이드 대신 전투부활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술사는 호드 전용이기 때문에 전투부활은 드루이드에게 주어졌다.
-주술사들은 고양술사에서 특성을 바꿀때마다 양손 도끼/둔기 숙련을 모두 잃어버렸다. 무기숙련이 고양술사 트리에 특성으로 있었기 때문.
-불성시절 사냥꾼의 딜 사이클은 버튼한개에 넣을 수 있었고 마우스 스크롤에 묶어두었다.
-불성시절 파흑의 딜 사이클은 어둠의 화살만 쓰는게 전부였다.
-레이드 약초꾼들은 레이드 시작전 보통 물약과 비약 수집 노가다라는 끔찍한 작업이 있었다.
-알터렉의 호드 시작 동굴은 지금보다 북쪽에 있었는데 블리자드는 남쪽으로 옮겼다. 호드가 발린다에 도착하는 게 얼라이언스가 갈반에 도착하는 것보다 빨라서.
-연금술사는 오직 영약을 연금술사의 연구실에서 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게임상에 연구실은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스칼로맨스 다른 하나는 검은 날개 둥지에.
-와우가 출시되고 몇 달동안 많은 접속자들로 인해 서버가 폭주하여 사람들은 보통 아이템을 룻하는 자세에서 굳어버리는 "모내기 렉"을 겪었다.

 


 

-통계창 뒤의 배경그림을 잘 살펴보면 노즈도르무를 볼 수 있다.
-블러드 엘프가 추가 되기전 대부분의 서버는 얼라이언스 우세였다.
-제일 긴 투기장 시즌은 37주동안 지속된 시즌8이었고 제일 짧은 시즌은 4와 5였다. 많은 사람들은(징기를 제외하고:P) 시즌2가 제일 최고였다고 생각하고 시즌5가 최악이었다고 생각한다.(아래에 있는 이유를 보세요)
-죽음의 기사가 리분에 추가되었을 당시 사기적으로 강하였다. 죽음의 그림자라는 죽었을 때 구울로 부활하는 특성이 있었는데 투기장에서도 발동됬다. 오, 그리고 두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어요 : "죽음과 부패"
-렙40까지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왜냐면 렙20에 탈것이 없었고 또한 겁나게 비쌌기 때문이다.
-트롤은 오리와 불성시절 동안 가장 후진 종특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농담은 "나는 초당 5의 체력을 회복 할 수 있고 너는 이걸 막을 수 없지!"
-가장 인기있는 호드의 종족/직업은 언데드 도적이었다. 왜인지는 얼라이언스 흑마와 사제들이 잘 기억하고 있을거라고 확신해요.
-보스와의 전투시에 물약을 많이 먹을 수 있었고 많은 물약을 가지고 오는 것은 필수였다.
-주술사의 몇몇 토템들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드워프의 석화는 독,질병,출혈에 면역이었으나 죽기들 때문에 너프되었다.
-오그리마 투기장은 구루바시 투기장처럼 같은 편을 공격 할 수 있는 곳으로 계획되었으나 이 기능이 구현된적은 없다. 
-검은 사원은 첫번째 컨텐츠 패치때 등장했다. 불뱀 제단과 폭풍우 요새는 불성 출시부터 공략이 가능했으나 버그가 심했다.

 

 

-블리자드 예전 웹사이트에는 어떤 몹이 플레이어를 가장 많이 죽였는지 보여주는 리스트가 있었다. 오리시절 동안에 1,2위는 데피아즈단 강탈자와 타락한 벨라스트라즈가 차지했다.
-타락한 벨라스트라즈는 당당하게 "길드 파괴자"칭호를 얻은 보스였다. 그는 단지 검은날개둥지 두번째 보스였으나 네파리온보다 약간 더 어려웠다. 화산심장부를 마치고 온 길드들은 수 많은 밤을 폭군 사슬송곳니와 그를 잡는데 보냈다.
-2010년 7월 블리자드는 웹사이트 토론장에 실명 ID 시스템을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바로 직후 기록적인 징징 폭풍이 토론장에 들이닥쳤다. 이건 와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징징이었다. 관련 스레드는 2000페이지가 넘어갔고 3일뒤 블리자드는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실명 ID에 대해 언급하지 말지어다"
-블리자드에 따르면 쿨티라스는 대격변때에 공개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얼음왕관의 십자군 토너먼트는 원래 수정노래 숲에서 열리기로 했으나 달라란의 렉때문에 얼음왕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2004년 오리 베타를 끝내기 전 블리자드는 수 많은 악마들과 커다른 몹들을 그냥 재미로 소환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Rs_nf...eature=related)   
-분노의 관문 연퀘에는 언더시티 전투가 이어져 있었으나 대격변때 위상 문제로 삭제되었다.
-길니아스 전투 전장은 원래 길니아스 시가지가 배경인 40인 전장으로 기획되었으나 블리자드는 더 규모가 작은 10인 전장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가장 너프가 많이 된 보스는 마그테리돈이고 그 뒤를 요그사론이 뒤 따르고 있다. 모든 너프뒤 마그테리돈은 출시때보다 2배 이상 쉬워졌다.
-렙1에서 60까지 찍는데는 지금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와우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이던 시절 60을 찍는데 대략 두달이 걸렸다.
-화산심장부에서 초열의 골레마그 뒤에는 가까이 가면 초당 3천에서 4천 데미지를 입히는 용광로가 있었다. 화산심장부 레이드 길드에서는 초보자들에게 여길 들여다 보면 라그나로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속이곤 했다. 그 말을 한 직후 15명의 사람들이 즉사했다. 
-상대방을 살펴보기위해서는 10미터 내에 접근해야만 했다. 만약 대도시에서 보라색 장비를 두른 플레이어가 서 있으면 살펴보기를 하기 위해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리때 아케나이트 도끼라는 무기가 있었다. 이 무기는 공속이 3.8이나 되서 오리시절내내 악명이 높았는데 전사와 고양술사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몇몇 냥꾼들은 대부분의 무기에 입찰을 해대서 나중에 "이거 냥꾼꺼네요"는 유명한 농담이 되었다.
-드워프 사제가 렙60을 달성한다는 의미는 (공포의 수호물 때문에 무슨 장비를 끼고 있어도) 바로 레이드 자리가 마련된다는 뜻이었다. 
-다른 플레이어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확인하는게 불가능했을 때 많은 힐러들은 특성바꾸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딜특성에서 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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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사원의 몇몇 구역에서 아제로스를 볼 수 있다.
-명예 승수처럼 일반 시민 NPC를 잡으면 올라가는 불명예 승수가 있었다. 이는 플레이어의 계급을 낮추었다.
-블리자드는 사실 대격변때 게임 내에 존재하는 에메랄드 드림에 새 텍스쳐를 추가하고 더 발전시켰다.


http://bamnot.tistory.com/258

2ːD¸estino l 2014. 11. 4. 14:07


개발자 뿐 아니라 창의적인 업무를 하시는 모든 분께 꼭 필요한 얘기같아 CodeFlow 에서 퍼왔습니다.




생산성과 시간 관리에 관한 세미나들을 참석하고, 이 주제에 관한 몇권의 책을 읽은 후 저의 작업하는 방식에 대해 깊게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으로 저의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설계하여, 생산성을 엄청나게 향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방법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향상하고 더 많은 작업을 수행하고, 여유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앞으로 설명드릴 내용은 개인 시간과 업무 시간을 관리하는 데 둘 다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은 원리적으로 같기 때문이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절대로 절대로 이메일 읽는 것으로 아침 업무를 시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방법들 중, 이 것 한 가지만이라도 적용해 보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아침 시작부터 이메일을 읽지 마세요. 업무 시작부터 이메일을 읽으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마음가짐 대신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상태가 되버립니다.

이메일은 꼭 하루 중 정해두신 시간에만 읽으십시오. 점심시간 전 대략 12시에서 오후 한시정도. 그리고 오후 4시쯤, 에너지 레벨이 어차피 낮아져서 생산성을 저하시키지 않는 때가 좋습니다. "긴급한" 이메일들은 사실 그리 급하지 않은 것이니 걱정마세요.


가능하면 회의는 피하라

회의는 회사 내에서 생산성을 죽이는 첫번째 요인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다들 압니다. (아마 인정하진 않겠지만)

"'회의'란 회사나 큰 조직에서 습관적으로 행하는 중독적이고 매우 자기만족적인 행위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자위행위 대신 회의를 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 데이브데리

네 그렇습니다. 중요한건 회의란ㄴ 것이 동시에 여러 사람의 생산성을 갉아 먹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꼭 참석해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세요. 당장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 그럴겁니다.) 참석 못하겠다고 한 후, 회의를 마치고 온 동료들로부터 회의 중 중요한 내용들만 골라서 듣도록 하세요.

만일 정말로 회의가 필요하다면 (흔치 않겠지만) 다음을 염두에 두세요.

  • 생산성이 어차피 떨어지는 오후 시간 늦게 하세요.
  • 언제나 회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집중하세요
  • 희의 끝나는 시간을 엄수하세요. 시간이 되면 회의를 끝내세요.
  • 명확하게 실행 할 수 있는 일을 정하지 않고서는 회의실을 나오지 마세요.


방해물 제거

매우 중요합니다. 정보화 시대에는 업무완수를 방해하는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우리 자신이 만드는 방해물과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방해물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드는 방해물부터 살펴보죠. 안 그럴 것 같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 스스로가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합니다. 많은 예들이 있죠. 이메일이나 SNS 알림을 켜놓는 다던지, 정신없이 이 업무 하다 저 업무 하다 한다던지, Hacker news나 Reddit에서 쓸 데 없는 문서를 들여다 본다던지, 하는 것들입니다.

일을 하고자 할 때 만큼은, 일 하는 것을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알림들을 모두 끕니다. 휴대폰 문자 착신음, 페이스북 업데이트 그리고 이메일도 끄고 업무에 필요하지 않은 Dzone이나 Hacker News등의 사이트를 접속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접속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한 것을 명심하세요. 우리 다들 IT 전문가들이고,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hosts"파일을 편집하여 페이스북 사이트가 127.0.0.1로 연결되도록 한다던지, 브라우저 추가기능으로 일시적으로 접속을 못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Blocksite plugin을 이용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만드는 방해물들의 대부분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드는 방해물로 넘어가죠. 위에 말한 경우도 다른 사람 때문에 생기는 방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살펴 볼 방해물들은, 외부에서 강요된 방해물들입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나요. 팀장이 이메일을 보낸 후 당신을 불러서 이메일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상황. 그래놓고 생산성을 말한다니. 이건 어떤가요? 디버깅에 집중하고 있을 때 동료가 와서는, 정말 기초적인 자바관련 질문을 합니다. 당신 머리속에는 "검색해봐 XX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들죠.

현실적으로는 앞서 말한 상황들은 차단하다보면 [상사나 동료의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 사회성에 문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방해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이디어 중에 하나는 헤드폰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잘 안 통할 때가 있긴 합니다만) 걸려오는 전화는 음성사서함으로 가도록하고 나중에 확인합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코딩중입니다"라는 종이를 붙여 놓는 것도 할 수 있죠.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직장환경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탐색해봐야 할 것입니다. 최종 목표는 방해 받지 않고 업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해야할 일 목록을 전 날 저녁에 준비한다

그 다음 날 해야함 하는 중요한 업무 사항 목록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 일들의 긴 목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 어차피 못합니다. 대신에 만일 완수한다면 프로젝트 진행에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 2-3개에 촛점을 맞춥니다.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만일 이 두가지를 오늘 끝내면 오늘 하루가 생산적이였다고 느낄까?" 만일 그렇다면, 그 두 가지를 적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먼저하기

위에 언급했듯이 이메일은 절대로 먼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럼 무얼 먼저 해야 할까요? 작업목록에 적은 가장 중요한 일! 당신은 가장 중요한 업무를 골라 냈습니다. 앉아서 다른 생각말고 그 일에 집중해야죠. 이상적으로는 한 번 앉은 자리에서 끄탠야합니다. 그 다음은 짧은 휴식을 취한 후 목록에서 두번째로 중요하다는 일을 해야죠. 최적의 결과를 위해 일과 휴식시간 관리를 어떤식으로 할지는 다음 항목에서 말하겠습니다.


배치는 데이터베이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쿼리 배칭에 관해 다들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짧게 말해 여러개의 비슷한 DB 쿼리를 모아서 한번에 보내면 속도가 향상됩니다. 최적화에 최선을 다 한다는 것, 이거 업무에도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이것을 적용하면 해당업무에 필요한 준비 시간을 최소화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업무를 완료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배치 처리를 할 수 있는 일들은, 이메일 확인 (또 나왔죠?), 전화응답 그리고 다른 모든 단순반복업무입니다.


자동화에 최선을 다해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화 개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래머로서 본질적으로 자동화 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자동화할 수 있는 하찮고 따분한 일들을 수동으로 하는 것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인간은 실수를 하고 기계보다 신뢰성이 떨어지고 하고 있는 일이 지루하고 중요하지 않으면 더더욱 실수하기 쉽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일들을 자동화 하세요. 예를 들면 어플리케이션 빌드를 한 번의 클릭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기계가 더 빨리 실수없이 할 수 있는 작업에 신경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세요.


최대의 성과를 위해 "작업"과 "놀이"를 병행하세요

작업을 실제로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 얘기할 시간입니다. 제안하고 싶은건 정해진 시간을 "업무"와 "휴식" 또는 "놀이"로 분할하여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45분동안 쉼없이 방해없이 특정한 업무에 집중하고 15분은 웹서핑이나 SNS 또는 최신의 Java Code Geeks 기사를 읽는다던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휴식시간 동안은 스크린을 쳐다보지 말고 몸을 좀 움직이세요. 정말이지 앉아만 있으면 몸 상합니다. 일어나서 좀 걸으세요.

놀이 시간은 긴 시간의 업무를 수행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상체계를 사용하면 보다 많은 업무를 완수 할 수 있고 재미도 있을 것이라고 장답합니다.

시간을 분배할 수 있도록 기술적인 도움이 되는 타이머 앱들이 있고 Pomodoro Technique를 가지고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 다 필기해놓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필기하는 습관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이나 내일 내야할 고지서라든지요. 두뇌의 역량을 "기억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완수하여야 할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두뇌를 CPU라고 생각해보시죠. "할 일"이라는 것은 백그라운드의 프로세스를 실행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꾸 일을 더하면] 결국은 멈추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필기를 하는 것은 두뇌의 일을 덜어주어 최적화상태로 동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생각들에 대해 따로 따로 목록을 만들고 분류합니다. 목록의 제목으로 "잠재적 프로젝트", "구입할 것들", "개발" 등등으로 붙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빨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몰입상태 활용하기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해 언급한 팀들을 적용해서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들 코딩을 할 떄 "몰입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몰두된 상태여서 특접업무나 문제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코딩하고 코딩하고 코딩만 머릿속에 있습니다. 외부자극은 두뇌에 전달되지 않고 당신과 당신이 몰두하는 IDE만 존재합니다. 감히 말하건데 80%의 업무 완수는 이런 몰입상태에서 이루어질것입니다. 이 글도 그런 상태에서 쓰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몰입상태에 쉽게 들어가고 그 상태를 가능한 오래 유지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몰입상태는 우리의 두뇌가 작업에 최적화 되어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몰입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하고 여러분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니 몰입상태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죠?




다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한 몇 개의 팁들이었습니다. 부디 단시간 (1-2주 정도) 시도해보고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려 주세요. 이메일을 보내도 좋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공유하세요. 만일 저 팁들이 도움이 된다면 동료들과 공유하세요. 우리의 작업 환경을 좀 더 최적화합시다. (역주: 얼래 공유 알림 또 가겠군요 ㅋ)


출처http://www.codeflow.co.kr/question/237/개발자를-위한-10가지-생산성-향상-팁-10-productivity-tips-for-software-developers/ 로부터..

2ːD¸estino l 2013. 11. 17. 22:38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Gp9ld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擊)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擂)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擂)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方程)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정(正)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싸이엔지(http://www.scieng.net/)에서

 

 

2ːD¸estino l 2013. 6. 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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